왜 우리가 굳이 히브리어를 알아야 해?

에덴의 언어, 히브리어로 복음의 심장을 읽다!
염보연 염보연
2026.02.10
2

1. 왜 ‘굳이’ 히브리어를 알아야 하는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에게 “히브리어를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이 돌아옵니다. 하나는 “그건 학문적인 영역 아닌가요?”라며 손사래를 치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번역된 한글 성경이 있는데 굳이 왜요?”라는 질문입니다.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성경이 어떤 배경과 어떤 언어의 토양 위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잠시 떠올려 보면,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더 본질적인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수천 년 전, 고대 셈족 문화권 속에서 히브리인들에 의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우리가 읽는 한글 성경은 20세기 한국어 체계와 문화 속에서 번역된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리와 기후, 유목과 농경의 삶, 그리고 그들의 언어 속에 당신의 진리를 깊이 새겨 두셨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한 민족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히브리어는 독특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롬 3:2)고 답합니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도록 선택된 언어였다는 뜻입니다.

 

번역은 분명 탁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그릇이 바뀌면, 의미의 핵심은 전달되더라도 미세한 결, 뉘앙스, 구조적 메시지는 상당 부분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지적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번역의 장막 뒤에 가려진 하나님의 본심을 다시 마주하기 위함입니다.

 

bible_hebrew.png

 

 

 


 

 

2. 구약으로 예슈아를 증거한 사도들의 비결

우리는 흔히 구약과 신약을 단절된 책처럼 이해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들이 가르쳤던 ‘성경’은 오직 타나크, 즉 구약 성경뿐이었습니다. 신약이 정경으로 확립되기 이전,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만을 가지고 예슈아가 메시아이심을 강론했습니다(행 17:2–3).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어떻게 ‘예수’라는 이름조차 직접 등장하지 않는 구약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 속에 메시아의 계시가 이미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슈아께서도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요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6장에 등장하는 성막 휘장 규례를 한글을 비롯한 다른 번역된 글자로 읽으면, 단순한 건축 지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휘장을 연결하는 표현에 ‘여자(אשה, 이샤)’를 ‘그녀의 자매(אחתה, 아호타)’에게 연합시킨다는 언어가 사용됩니다. 이는 장차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슈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될 구속사의 방향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의 ‘열 처녀 비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이처럼 히브리어를 통해 성경을 읽을 때, 난해해 보이던 구절들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복음의 구조와 흐름을 증언하는 살아 있는 언어로 다가옵니다.

 

 

 


 

 

3. 문자에 새겨진 설계도, 하나님의 DNA

히브리어의 또 다른 독특함은 문자 자체가 메시지를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예슈아(ישוע)’라는 이름을 구성하는 히브리어 문자의 형태를 살펴보면, 성소 안의 일곱 등잔대인 메노라를 연상시킵니다. 메노라가 성막 안에서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듯, 예슈아 역시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문자 자체가 그림처럼 증언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총 22자입니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DNA는 22쌍의 상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성염색체 제외). 히브리어 문자들이 창조의 ‘언어적 벽돌’이라면, 그 구조 위에 생명이 세워졌다는 성경의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창조 질서에 대한 통찰로 읽힙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히 11:3)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창조의 설계도였음을 선포합니다. 히브리어는 그 설계도를 기록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한 목적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히브리어를 보존하셨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장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히브리어를 모르면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대인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다는 사실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900_Sandrine-Kespi-Creations_Hebrew_alphabet_17x17_300dpi_4.jpg

 

 

 


 

 

4. <테필린365>와 히브리적 관점의 훈련

그렇다면 이 깊고 입체적인 히브리어를 우리는 어떻게 접해야 할까요? 단어 몇 개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문자적 의미, 상징적 개념, 수치적 구조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삶 속에 새기는 훈련, 다시 말해 ‘체득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실 모든 언어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테필린365>가 지향하는 지점입니다. ‘테필린’은 “말씀을 손에 매고 이마에 붙이라”(신 6:8)는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이 말씀을 몸에 새기며 살아온 신앙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2,500년의 유리 방황 속에서도 말씀을 암송하고 반복하는 이 훈련을 통해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슈아 안에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은 우리는, 이 정신을 신약적 관점에서 다시 회복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테필린365>를 발간하게 된 것이고, 이를 통해 추구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번역 과정에서 희미해진 하나님의 마음을 히브리어 단어들과 개념들, 직역 성경 본문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해 가고, 둘째, 파편적인 성경 읽기에서 벗어나 토라포션의 흐름 속에서 말씀 전체를 조망하게 하며, 셋째,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반복과 소리내어 읽기 훈련을 통해 말씀을 실제 삶에 새기도록 돕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야곱’을 흔히 ‘속이는 자, 조용한 자,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 음흉한 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그를 ‘탐(תם)’, 즉 ‘온전하고 경건한 자’로 묘사합니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들의 사람’이었던 ‘에싸브(에서)’가 아니라, ‘장막의 사람’이었던 ‘야아콥(야곱)’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번역의 한계로 생겨난 오해가 히브리적 관점 안에서 바로잡힐 때, 우리의 신앙 역시 감정적 열심이 아니라 정확한 이해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image.jpeg

 

 

 


 

 

5.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

말라기 4장 6절은 마지막 때에 엘리야의 사역이 임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킬 것”이라 예언합니다. 여기서 ‘마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브(לב)’는 감정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중심’,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지금은 그 아버지의 심장이 히브리어라는 통로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전해지는 시대입니다. 히브리어는 선택적인 취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책임이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누려야 할 특권입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 <테필린365>와 함께 히브리어 속에 감추어진 복음의 보화를 다시 찾는 여정에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길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익숙한 신앙의 방식에 비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은 자신의 편안함이나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이 거친 광야 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히 알고자 하는 갈망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갈망에는 마땅한 대가 지불이 뒤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씨 뿌리는 자를 억울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향해 뿌린 수고는 반드시 기쁨의 열매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신뢰해도 좋습니다.

에덴에서 울려 퍼졌던 그 생명의 언어가, 번역의 벽을 넘어 여러분의 영혼을 깨우고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또렷이 대면하게 할 것입니다. 이제 문을 두드리십시오. 히브리어의 숲 속에서, 예슈아의 복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6-02-COVER.jpg

2
Comments2
  • 고진호
    고진호 2026.02.10 15:48
    매일 테필린365와 함께 히브리어 숲 길을 걸으며 말씀을 읊조리겠습니다. 예슈아의 복음으로 내 영혼이 깨워지도록!
  • 이풍훈 2026.02.10 20:08
    네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제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신입생같은 기분으로 열공(멸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