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때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은 간첩과 다를 바 없다. 복음은 천국행 티켓 정도로 취급될 값 싼 은혜가 아니다. 복음은 어둠을 이기는 빛의 전쟁으로의 초대장이다. 이미 이긴 전쟁이다. 너머에 영원한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삶과 사역의 분리, 삶과 신앙생활의 분리는 결국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아닌, 일부만 하나님께 드리는 척하는 일이다. 내 입맛대로 내가 원할 때만 거룩하고 신실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거룩과 성결로부터 멀어진 삶의 모습이다.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왕이신 하나님을 잊고 그 말씀을 잊어버려서 사사라는 존재 마저도 하나님이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인신 제사를 드렸던 그때처럼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두며,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고 자기들의 배만 불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범죄하고 돌이키고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늘 그분의 은혜와 주권을 더욱 깊이 각인시켜 주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책을 읽으며 내 삶에 하나님의 주권이 철저히 인정되지 않았던 영역들을 돌아보게 하셨다. 특히 영지주의에 대한 부분을 볼 때,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고, 땅의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주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는 것에는 하늘의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학생 때에 학업에 열중하는 부분이나 지금 성인이 된 후 돈을 버는 일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등한시 여기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림과 동시에, ‘어차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학업과 재정이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말씀이 비단 복음을 전하는 등의 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본분을 다하는 그 수고에도 해당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학생이면 학업, 직장인이면 직장에서의 일, 가정 주부라면 가정에서의 가사 노동과 가정을 돌보는 일 등을 성실히 하는 것 또한 주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우리의 수고라는 것.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그 나라를 이룬 것처럼 사는 것,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 중 하나임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니엘에 대해 묵상할 때, 사실 항상 ‘왜 굳이 꿋꿋이 창문을 열고 기도했을까? 나였으면 그 시기 동안은 닫고 기도했을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걸 두고 융통성 있다, 지혜롭다고 말하겠지?’라는 생각들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결국 그 행동의 핵심이 ‘구별’이라는 것,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구별이라는 것,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 기도한 그 마음의 동기와 중심이 구별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네가 가는 그 길이 곧 정답”이라고 말하며 획일화된 가치와 도덕적 규율을 거부하고, Love your self 가 핵심 키워드가 된 이 시대는 너무나 크게 병들어간다는 것을 느낀다. 최근 인터넷을 보면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그에 따라 생명에 대한 감사 또한 사라져간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께 대하여 ‘이렇게 살 바엔 낳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단 가정 폭력을 겪거나 어려운 삶을 사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다 하지 못하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하며 부모를 비난한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세상의 풍조 속에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교인들도 영적 왕자병과 공주병에 걸려가는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무익한 종’임을 고백해야 하는데, 그때에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인데, 처음부터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자ㆍ공주에요.”라고 가르치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가 아닌, 마땅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평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걸음걸음마다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과의 친밀함만큼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될 테지만,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 정도로만 여기는 삶을 산다면 당연히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조차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다면 우연의 일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응답 받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한다. 자기 잘못과 욕심과 실수로 벌어진 일들 마저도 하나님을 탓하고,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았으면서 불평은 하나님께 쏟아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를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기 때문에 잘 되면 다 내 덕, 못 되면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 된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찬양이랍시고 하나님이 전혀 없는 노래들을 부른다. 대표적으로 공감하시네,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등.. 그저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가사의 곡들을 부르면서 눈물이라도 흐르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진짜 은혜를 받으면 말씀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기에 삶의 방향과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 은혜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해주는 리더 또한 없으니, 눈물 콧물 흘리고 가슴이 뛰면 그 신체적 반응이 곧 은혜라고 착각하면서 자기 감정에 취한 것과 은혜 받은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교회들은 문턱을 낮추다는 핑계로,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멋대로 인용하면서 계속해서 등록 교인의 수를 늘리는 데에만 집착한다. 결국 수는 늘어도, 제자는 사라진다.
누군가는 교회 일이나 어떤 기독교 단체의 일을 열심히 하면 그게 순종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일에 몰두할수록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랬다. 학생선교사를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와 선교단체 사역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선교지에서처럼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았고,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며, 매일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꿀처럼 달콤했다. 그러나 점점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을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열매가 많아 보이기 위해, 사람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지치고 병들어갔다. 교회에서 매주 주일 예배와 금요 철야의 반주를 섬기고 있으니까, 월 화 수 목 토 쉬는 날 없이 캠퍼스 사역과 선교단체 예배로 가득찬 스케줄 속에서 예배팀으로, 메신저로, 간사로 섬기고 있으니까, 나는 괜찮을 거라고, 내가 속한 이 단체의 믿음이 곧 내 믿음이라고 착각했던 시기도 있었다. 결국 선교단체 사역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1대 1 관계를 다시 시작하여 그 친밀함에 도달하기까지, 사람이 싫어진 그 마음으로부터 방전된 에너지와 고갈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이 우리를 훈련하는 본진이라는 것을 토대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한 점은 믿음의 어머니와 또 독신이신 외삼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주’가 아닌 ‘영적 군사’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지금의 나는 이제 외삼촌이나 어머니의 개입을 이전보다 훨씬 덜 받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미디어가 채우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미디어에 시간과 생각을 소모하는 것이 곧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는 말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 한번도 내가 미디어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독 수준이 아니면 괜찮다고, 하루에 이 정도 보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곧 생명이라는 이 책의 정의와 전제를 통해, 내가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린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미디어라는 우상에게 주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노동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재정비하게 되었다. 노동을 폄하하거나, 업신여긴 적은 없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증명하는 가장 신성한 행위가 바로 노동이라는 것이 깊은 통찰로 다가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동역이라는 것까지.. 또한 이 노동의 가치와 공산주의ㆍ사회주의적 발상이 어떻게 대립되는지, 맘몬이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지에 대해 명확히 다루어져 있으니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노동’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순복음 재단의 한세대학교 신학부, 기독교교육상담학과를 졸업했다. 기독교교육상담학과 또한 신학부 소속이기에 신학 수업 중에서도 전공 기초, 전공 필수 과목들이 있었는데, 4년간 신학과 수업을 들으며 대부분의 수업이 성경적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을 보고 늘 시험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에서 말하듯 좌파 이데올로기, 즉 인간이 만드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을 대체하고, 개인의 긍휼과 사랑으로 베풀어야 마땅한 선의를 국가가 강제적으로 집행하는 부의 재분배가 대체하고, 그렇게 사람들이 국가를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칭송하고 의지하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을 지워버리는 그 사상을 심지어 교회와 신학교들마저 분별하지 못하며 목회자들이 ‘평등, 사랑, 존엄, 인권’ 등의 그럴 듯한 단어와 함께 성도들의 눈을 가리운다는 것이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순복하는 것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져 간다는 믿음을 주셨다. 또한,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게 하심에 감사하며, 이 어려운 시기에 여러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마음을 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일들 또한 일어나고 있음을 보면서 소망을 품게 하셨다. 이제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았던 삶의 영역들, 미디어에 소모했던 시간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나를 위해 사용하던 재정, 순간순간 주 예수님의 기쁨이 아닌 나의 즐거움을 선택했던 것들을 회개하고,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나에게 주신 선교 사명 앞에 다시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이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구하며 그 뜻을 이루어 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심을 예비하며,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 날에, 영광스러운 주의 보좌 앞에 서서 주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받기 합당한 자가 되고 싶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