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에 대한 오해와 진실

돈을 드린다는 것, 삶의 주인을 고백한다는 것
염보연 염보연
2026.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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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마다 우리는 봉투 하나를 손에 듭니다. 그 안에 담긴 금액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순간 마음속을 스치는 생각은 의외로 비슷합니다. 누군가는 잘 드렸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이번 달의 형편을 계산합니다. 또 누군가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과 죄책감 앞에 머뭇거립니다.

어쩌다 헌금은 우리에게 은혜보다 부담으로, 기쁨보다 무게로 먼저 다가오는 말이 되었을까요?

헌금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려면, 먼저 우리가 헌금에 대해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해가 걷히지 않은 자리에서는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또 하나의 의무가 되고, 아무리 옳은 권면도 마음을 짓누르는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드린다고 생각해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헌금에 대한 오해, 그리고 병든 자리

오늘날 교회 안에서 헌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란은, 사실 헌금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시작된 문제가 아닙니다. 그 밑바닥에는 훨씬 오래되고 깊은 착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은 뒤의 구원’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복음이 오직 ‘죽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로 축소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과 몸과 물질은 구원과 별 상관없는 대기실처럼 취급됩니다. 신앙은 주일 몇 시간의 종교 활동으로 좁아지고, 나머지 엿새의 삶은 신앙과 분리됩니다. 특히 돈을 벌고, 쓰고, 모으고, 나누는 삶의 가장 현실적인 영역은 신앙의 바깥에 그대로 방치됩니다.

헌금에 대한 왜곡은 바로 이 분리된 자리에서 자라났습니다.

한쪽에서는 헌금이 복을 얻기 위한 거래로 변질되었습니다. 드린 만큼 더 많은 복을 돌려받고, 드리지 않으면 저주나 실패를 피할 수 없다는 식의 계산과 위협이 강단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냉소가 퍼졌습니다. 헌금은 교회가 성도들의 돈을 거두기 위해 만든 제도이며, 십일조 역시 이미 폐기된 율법의 잔재이니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강요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가 어느 순간 ‘예물’ 자체를 부정하는 자리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 두 태도는 정반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같습니다. 둘 다 헌금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가 아니라 ‘납부’로 이해합니다. 한쪽은 그 ‘납부’를 강요하고, 다른 한쪽은 그 ‘납부’를 거부할 뿐입니다.

여기에 불투명한 교회 재정 운영과 실제로 반복되어 온 부정과 부패까지 더해졌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물질과 신앙의 관계는 더욱 심하게 뒤틀렸습니다. 돈을 드리는 일은 기쁨이 아니라 시험이 되었고, 자유로운 고백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굴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헌금은 돈을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흔히 ‘헌금’이라고 부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흥미롭게도 성경은 ‘예물’을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말하지 않습니다. ‘헌금(獻金)’이라는 말은 ‘돈 금(金)’ 자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금액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예물을 가리켜 사용하는 말들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드리는 사람의 마음, 그리고 교회(회중)를 향한 책임을 가리킵니다.

토라는 제물을 ‘코르반(קרבן)’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가까이 나아가다(קרב)’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단지 무엇인가를 내어놓고 잃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성막을 세우기 위해 드린 예물은 ‘들어 올려 구별한 것’을 뜻하는 ‘테루마(תרומה)’라 불렸고, 자원하여 드린 예물은 마음에서 기꺼이 내놓은 것을 뜻하는 ‘네다바(נדבה)’라 불렸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를 독려하여 예물을 모았지만, 그 일을 단순히 돈을 거두는 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예물의 일을 ‘은혜’라 불렀고(고후 8:1, 4, 6-7), 성도들의 필요에 함께 참여하는 ‘사귐’이라 불렀으며(고후 8:4, 9:13), 성도들을 돌보는 ‘섬김’이라 불렀습니다(고후 8:4, 9:1, 12). 바울이 바라본 것은 모인 금액만이 아니라, 예물을 통해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한 몸으로 서로의 필요를 감당하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일이 아닙니다. 돈이라는 가치 체계 안에 나의 마음과 중심을 담아 왕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봉투나 계좌에 담기는 것은 일정한 금액이지만, 그 안에는 그 돈을 얻기 위해 들인 나의 시간과 수고와 삶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돈만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에 배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는 순간 헌금은 곧바로 계산과 거래로 굴러떨어집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붙들 때, 헌금은 더 이상 납부가 아니라 가장 정직한 신앙고백이 되고,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예배가 됩니다.

 

왜 하필 ‘물질(재정)’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데, 왜 굳이 돈까지 드려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질문에 답하셨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_마태복음 6:21, 새번역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곳에 돈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돈을 계속 사용하는 곳을 따라 우리의 마음도 움직입니다. 보물과 마음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돈은 단순한 종잇조각이나 숫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지를 매우 정직하게 보여 주는 저울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의 재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우리의 입술은 얼마든지 그럴듯한 고백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우리의 재정은 좀처럼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인으로 말씀하신 대상은 재물, 곧 ‘맘몬’이었습니다(마 6:24). 돈은 단순히 중립적인 도구로만 머물지 않고, 언제든 우리 삶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려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돈은 우리에게 안정과 힘과 자유를 약속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 줍니다.

그렇기에 물질을 구별하여 드리는 일은 단순한 종교적 절차나 의무적인 납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삶으로 밝히는 가장 직접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사라지면 우리의 생각과 살림은 어느새 세상의 경제 논리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삶에 뿌리내리면, 돈은 더 이상 주인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도구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헌금의 목적은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돈이 내 삶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그 지배에서 벗어나고, 하나님만이 내 삶의 참된 주인이심을 삶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무엇인가?

이쯤에서 가장 예민한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십일조에 대한 물음입니다. 십일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십일조가 무엇인지부터 토라의 관점에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히브리어로 ‘마아세르(מעשר)’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십분의 일’ 또는 ‘열 번째 몫’을 뜻합니다. 토라는 토지의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구별하도록 했고, 가축의 경우에는 목자의 지팡이 아래를 지나가는 것 가운데 열 번째 것을 야훼께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도록 했습니다(레 27:30-32).

그러므로 십일조는 단지 내 소유 가운데 일부를 떼어 납부하는 행위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열 번째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행위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모든 것의 참된 주인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를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전부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십일조에 담긴 중요한 의미입니다.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는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오래전에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의와 평강의 왕 멜기세덱에게 전쟁에서 얻은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주었고(창 14:18-20), 야곱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창 28:22). 그러므로 십일조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단지 ‘폐기된 율법의 잔재’로만 규정하는 것은 충분한 이해가 아닙니다.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리는 행위는 모세 율법보다 앞선 시대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세금이나 회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구별하여 왕 앞에 나아가, 내 소유와 삶 전체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토라의 십일조 가운데는 하나님 앞에서 가족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도록 명령된 것이 있었고(신 14:22-27), 매 삼 년째에는 성읍 안에 쌓아 두어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한 십일조도 있었습니다(신 14:28-29).

즉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 백성을 쥐어짜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땅의 기업을 받지 못한 이들과 삶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이들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토라가 보여 주는 십일조의 중요한 열매는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기쁨과 이웃을 향한 나눔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십일조를 걷는 일은 강조했지만, 그것을 통해 함께 즐거워하고 어려움에 처한 지체와 이웃을 돌보는 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킹덤처치가 예물을 나누는 네 갈래

킹덤처치는 토라가 보여 주는 예물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이 네 갈래의 물길을 따라 흘러가도록 재정을 운영합니다. 예물의 의미를 말로만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드리고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익혀 가기 위해서입니다. 배운 대로 드리고, 드리는 대로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1. 십일조

십일조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 모든 소유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예물입니다. 킹덤처치에서는 이 예물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지탱하는 기본 재정으로 사용합니다.

옛적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성막을 섬기던 레위인들의 삶을 책임졌듯이, 오늘도 말씀을 가르치고 예배를 섬기며 교회를 돌보는 사역이 이 예물을 통해 이어집니다. 십일조는 단순히 교회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회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함께 책임지는 예물입니다.

2. 감사헌금

감사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응답에 대한 감사를 물질에 담아 올려 드리는 예물입니다. 토라의 감사제물은 드린 사람이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안에 다른 이들과 함께 먹으며 기쁨을 나누어야 했습니다(레 7:15).

감사는 마음속에만 머물거나 혼자 누리는 감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예물을 통해 다른 지체들에게 흘러가고, 교회가 함께 기뻐하는 잔치가 됩니다. 킹덤처치의 감사헌금은 바로 이러한 감사와 기쁨이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누어지도록 사용하는 예물입니다.

3. 쩨다카헌금

쩨다카헌금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지체를 돕기 위한 구제 예물입니다. 히브리어 ‘쩨다카’는 단순한 자선이나 선행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의로움’과 ‘정의’를 뜻하는 ‘쩨데크’에서 나왔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 일은 여유 있는 사람이 베푸는 선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로운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부족함을 보고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나누어 그 필요를 채우는 것이 쩨다카입니다.

킹덤처치의 쩨다카헌금은 다른 재정과 엄격히 구별하여 관리하며, 오직 구제와 실제적인 필요를 돕는 일에만 사용합니다.

4. 킹덤아미펀드

시대가 변할수록 신앙과 진리를 지키는 일에는 실제적인 대가가 따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소송을 당하거나, 경제적·사회적 공격을 받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킹덤아미펀드는 바로 그런 날을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두는 기금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고 고백해야 하는 자리에 어느 지체가 서게 될 때, 그 싸움을 개인의 몫으로 남겨 두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대가를 치를 때, 그를 홀로 싸우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 함께 짐을 지겠다는 약속입니다. 킹덤아미펀드는 신앙을 지키다 어려움에 처한 지체를 실제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연대의 예물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 그러나 반드시 오실 왕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토라의 십일조가 그토록 아름다운 질서였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오늘날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토라가 보여 준 예물의 질서는 단순한 종교 규범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살림 전체를 떠받치는 체계였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는 국가의 중심이었던 성막과 말씀을 섬기는 이들의 삶을 책임졌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십일조는 사회적 돌봄의 역할을 했으며, 절기에 사용하는 십일조는 온 백성이 국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게 했습니다. 신앙과 삶, 예배와 통치, 경제와 돌봄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맞물려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토라 시대와 다릅니다. 토라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의 통치 질서였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는 그 질서를 따라 운영되지 않습니다. 예배와 나라의 운영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졌던 이스라엘과 달리, 오늘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다른 영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도 따로 운영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국가에 내는 세금도 서로 다른 목적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가 보여 준 국가적 질서를 오늘날 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마 22:21)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며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책임을 감당하는 동시에, 하나님께는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물은 토라 시대와 똑같은 국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교회를 세우고, 말씀과 예배를 섬기는 사역을 이어 가며, 감사를 함께 나누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기 위해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토라의 국가적 질서가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의무나 강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난 자원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은 지금과 같은 세상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나라가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완전히 이루어지고, 지금은 깨어져 있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억울하게 눌리는 사람도, 가난과 두려움에 짓눌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단지 교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미리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돌보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먼저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완전히 오지 않은 그 나라를 오늘 우리의 삶으로 조금씩 앞당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원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_고린도후서 9:7

 

예물은 강요될 수 없습니다. 억지로 드린 것은 이미 참된 예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원함이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원함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달은 사람이 기쁨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돈보다 더 사랑한다는 고백은 입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일은 그 고백을 삶으로 실천하는 가장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매주, 매달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다시 고백하고,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안에는 한 가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이상 아깝지 않게 되고, 돈의 많고 적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킹덤처치의 모든 지체가 이 자유와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실 왕 앞에서, 기쁨으로 예물을 드렸던 삶을 함께 올려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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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1
  • 박상일 2026.07.11 12:18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 모든 것의 참된 주인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담겨 있다는 말씀에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