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할 때

바울은 왜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 보냈을까요?
염보연 염보연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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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법만 따르면 된다”며 현실의 모든 질서를 무시하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극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최종 기준으로 삼되,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바로 그 원리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토라에 기록된 한 가지 계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주인에게서 도망하여 네게로 온 종을 그의 주인에게로 돌려보내지 말라”(신 23:15)는 말씀이 나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도망친 노예를 붙잡아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억압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을 다시 폭력과 압제 속으로 밀어 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규정은 이스라엘 땅으로 피신해 온 종에 대한 법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 있는 자의 권리보다 억눌린 자의 생명과 자유를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바울은 매우 복잡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을 떠나 로마까지 도망쳤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예슈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 앞에는 쉽지 않은 문제가 놓였습니다. 로마법은 도망친 노예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요구했습니다. 반면 토라의 원칙은 도망쳐 온 종을 함부로 다시 넘겨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오네시모를 붙잡아 강제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끝까지 숨겨 두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스스로 돌아가도록 권면했고, 그 손에 <빌레몬서>를 들려 보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로마법을 집행하는 관리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토라를 명분으로 교회 안에 또 다른 갈등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빌레몬서>를 읽어 보면 바울은 한 번도 명령하는 어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충분히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으로 ‘권면’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다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도 합니다. 바울은 법적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사람의 양심을 움직이도록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태도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력을 앞세워 세상의 제도를 뒤엎는 방식으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질서에 무조건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마음, 즉 생각과 감정과 가치관을 먼저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람이 관계를 바꾸고, 가정과 자기가 속한 모임들을 바꾸며, 결국 세상까지 변화시켜 갑니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도망친 노예가 아니었고, 빌레몬도 더 이상 단순한 노예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둘 다 같은 왕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단지 ‘질서를 유지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법은 ‘정의와 긍휼을 함께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법조문만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붙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토라의 정신을 버리지 않았고, 로마법을 무시하며 불필요한 충돌과 갈등을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고민하며 찾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자주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성경의 원칙과 현실의 제도가 서로 긴장 관계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두 극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더 어려운 길’을 보여 줍니다.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길, 하나님의 기준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바로 그 길이 예슈아께서 걸으셨고 사도들과 성도들이 따라 걸어갔던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인도하고 돕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달랑 한 장으로 된 <빌레몬서>가 왜 정경에 포함되었을까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바울의 편지는 단지 노예제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실제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작은 복음서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충돌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힘도, 더 큰 목소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서도 복음이 사람의 마음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도록 믿고 기다리는 지혜입니다. 결국 세상을 가장 깊이 변화시키는 힘은 강제적인 법이나 정책이 아니라, 예슈아의 통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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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3
  • 조안나 2026.08.19 09:05
    빌레몬서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제서야 배웁니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또 신약에서 예수아께서 완성하신 율법이 더 무겁고 어려운 길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마음으로도 죄를 지으면 안되고 세상 법도 지켜야하고..🥹
    성령님 혼탁한 상황 속에서도 기록된 말씀과 복음 전파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 이풍훈 2026.08.19 16:10
    아멘!!
    빌레몬서의 오네시모를 보며, 예전 정부때 판문점에서 강제북송했던 사건이 생각나네요~그때 정부가 악인의 길을 떠나 토라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예슈아의 제자였다면,판문점에서 머리를 땅에 내려치며 자해하려했던 그분들은 지금 우리와 같이 예슈아의 오심과 천년왕국 기대하며 살지않았을까 생각합니다.세상에 악인들이 예슈아를 믿고 변화받아 새 삶을 살아가길 소망하며,저 또한 토라의말씀과 세상법의 혼선에서 예슈아의 통치와 지혜로 승리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 이지영 2026.08.20 22:45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길,
    하나님의 기준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길,
    복음의 진리 안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고민하며 찾아가겠습니다.
    성령하나님, 제가 만나는 모든 상황 가운데 바울에게 주셨던 지혜를 제게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