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의 웃음, 그리고 너무 오래된 약속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면 우리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조차 믿지 못하게 됩니다
염보연 염보연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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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세 명의 방문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장막 안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처음 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약속을 받은 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데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기대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되고 자신의 몸마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을 완전히 잃게 되자, 약속은 어느새 현실적인 소망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나온 것은 기쁨의 환호가 아니라 ‘웃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웃음 앞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야훼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_창 18:14

 

그리고 창세기 21장은 이삭의 출생을 기록하면서 다시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_창 21:2

 

이처럼 인간의 눈에는 너무 늦어 버린 약속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에서는 정확히 정해진 때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표현 때문에 유대 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이삭이 어느 절기에 태어났는지를 논의해 왔습니다. 탈무드에는 유월절과 연결하는 전승이 있고, 로쉬 하샤나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로쉬 하샤나 첫날에는 사라가 약속의 아들을 낳는 창세기 21장을 토라 본문으로 읽습니다. 물론 성경 자체가 이삭의 생일을 특정 절기로 명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왜 로쉬 하샤나에 이 이야기를 읽어 왔느냐는 것입니다. 한 해의 새로운 시작에서, 인간적으로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며 모에드에, 곧 자신이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라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가 하나님의 언약을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이어서 웃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다림이 길어지면, 불신앙은 반드시 노골적인 부정이나 배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여전히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라는 이미 ‘이스마엘’이라는 현실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약속이 자신의 현실 속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긴 기다림’이 우리 삶 속에 만들어 내는 가장 미묘한 ‘위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그 언약 없이 살아가는 데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도 비슷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구원을 선포하셨지만, 성경은 백성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출 6:9)고 기록합니다.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을 몰랐거나 잊어버렸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노예 생활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세대를 거듭해 압제를 경험하는 동안 구원은 신앙의 전승으로는 남아 있었지만 당장 현실이 될 수 있는 소망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무 오래 고통과 시련이 계속되면 사람은 절망하는 것조차 지쳐 버립니다. 결국 현실에 적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 나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먼 이야기로 밀어내게 됩니다.

메시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고백하고, 성경을 읽으며 재림에 관한 말씀을 반복해서 접합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승천하신 이후 거의 이천 년이 흘렀고 그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재림은 어느새 실제로 오늘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이라기보다 교리책 마지막 부분에 기록된 종말론적 항목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예슈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에는 ‘아멘’하지만, 오늘 그분이 오실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고백하지만 정작 실제 나의 삶은 그분이 당분간 오시지 않을 것을 전제로 설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런 시대가 올 것을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뒤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하지 못합니다. 사라의 나이가 약속을 취소하지 못했고, 애굽에서의 사백 년이 출애굽의 약속을 폐기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천 년의 기다림도 왕의 다시 오심을 무효로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이 실제인지 아닌지 더욱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예슈아께서 정말 오늘이라도 오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삶과, 머리로만 재림을 인정하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습니다. 정말 왕께서 오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삶을 준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기고, 미뤄 둔 순종을 바로잡으며, 해결하지 않은 관계의 문제들을 돌아보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됩니다. 왕의 다시 오심은 미래의 사건을 알아 맞추는 지식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당장 내 현재의 삶을 바꾸는 믿음의 능력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쉬 하샤나의 나팔 소리도 단순히 먼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잠들어 있는 기대를 깨워 다시 하나님 앞에 삶을 정렬하게 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이야기는 단지 ‘의심의 비웃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 년 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아들이 태어났고, 사라는 다시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습니다!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_창 21:6

 

그래서 그 약속의 아들의 이름은 이쯔하크(יצחק), 곧 ‘그가 웃을 것이다’, ‘웃음’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여 비웃었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 불가능했던 약속이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냉소적인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꾸셨습니다.

성경은 장차 우리의 웃음도 그렇게 바뀔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예슈아께서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26편 역시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를 바라보며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지금은 메시아의 다시 오심을 말하면 비현실적이라고 웃는 시대일지 모릅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너무 오래 기다린 나머지 마음 한편에서 사라처럼 웃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모에드’가 이르면 그 웃음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로쉬 하샤나는 바로 그 사실을 지금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래되었다고 낡아지는 것이 아니며, 기다림이 길다고 취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 날짜를 특정해서 알지 못할 뿐,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 날은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정한 때에 왔듯이, 메시아께서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으로 기다려 온 모든 약속이 현실이 될 때, 우리 역시 사라와 함께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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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5
  • 조안나 2026.09.09 09:26
    영원의 하나님 앞에서 시간의 길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기억하겠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기를 쉬지 않겠습니다. 지치지 않겠습니다!! 아멘아멘
  • 김연경
    김연경 2026.09.09 09:40
    아멘,
    내가 정한 기한과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닌 오직 주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오늘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며 더욱 죄에 민감해지고,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안에서 한번 더 묻고, 감찰하며 다시 기쁨을 누릴수 있는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는 바라는것은 있지만, 정작 바라는것에 대한 나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릴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닌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을 분별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참 자녀가 되겠습니다.
  • 이풍훈 2026.09.09 11:35
    하나님의 말씀을 과거 기록이나 소설속 이야기로 믿는 저를 돌아보며 회개합니다.저에게 늘 기억하고 암송케 하시는 '너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언약의 말씀이 지금도 모아드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저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이루어짐을 믿고 소망하며 광야를 걸어가겠습니다
  • 라채돈
    라채돈 2026.09.09 18:50
    먼지가 쌓였을
    오래된 기억들로 남은
    간절했던 기도의 제목들을 찾아봅니다.
    하나 하나 가슴을 울리는데
    나의 기도는 언제 멈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기도의 향을 피웁니다.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십니다.
  • 김주언 2026.09.09 21:38
    아멘!
    약속의 기다림이 너무 길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 약속을 잊지 않는 자가 되겠습니다.
    또 저에게 의심의 비웃음이 남아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 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바꿔주실 것을
    기억하겠습니다.